이란 전쟁이 남긴 상흔: 전 세계 원유 비축량 40년 만에 최저치로 추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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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전쟁이 남긴 상흔: 전 세계 원유 비축량 40년 만에 최저치로 추락

게시일: 2026-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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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년 초, 국제에너지기구(IEA) 회원국들의 전략비축유(SPR) 규모는 약 18억 배럴 수준으로 쪼그라들었습니다. 이는 지난 2004년의 약 41억 배럴과 비교하면 엄청난 감소입니다. 석유 시장 역사상 가장 거대했던 공급 충격(이란 전쟁)을 마주했을 때, 전 세계 정부와 산업계가 동원할 수 있었던 방어벽(버퍼)은 20년 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던 셈입니다.

  • 미국의 전략비축유는 1983년 이후 최저 수준인 약 3억 3,100만 배럴까지 떨어졌으며, 비축유를 포함한 미국의 총 원유 재고 역시 1984년 이후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축유 충원 속도가 워낙 더디기 때문에, 이러한 수십 년 만의 최저 재고 수준은 향후 수개월간 국제 유가 시장에 강력한 하방 지지 요인으로 작용할 전망입니다.

  • IEA 추산에 따르면, 고갈된 비축유를 이전 수준으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통상적인 수요 성장세 외에도 향후 3년간(2029년까지) 매일 100만 배럴의 추가 공급이 필요합니다. 비록 2027년에는 원유 공급 과잉이 예상되지만, 이러한 지속적인 비축유 충원(Refill) 수요가 유가를 떠받치면서 '저유가 기조'와 '적극적인 비축유 재충전'이 동시에 양립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 과거 저가에 매입되어 비축유 창고를 채웠던 원유들은 전쟁을 거치며 방출되었고, 이제는 훨씬 더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다시 사 와야 합니다. 미국의 경우 기존 비축유의 평균 매입 단가는 배럴당 $29.70였으나, 현재 재충전 비용은 약 $70에 달합니다. 여기에 중동 걸프 지역의 선박 운임 및 보험료 프리미엄이 배럴당 약 $2씩 영구적으로 얹어지면서, 글로벌 에너지 교역 비용은 매년 120억~150억 달러 가량 추가로 지출되고 있습니다.


유가는 전쟁 전으로 돌아왔지만, 비축유 창고는 비어있다

브렌트유 가격은 전쟁 전 수준인 배럴당 70달러대 초반으로 돌아왔으며, 미국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역시 전쟁 발발 하루 전인 지난 2월 27일 이후 처음으로 70달러선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고점이었던 전쟁 당시 $120 위에서 약 40%가량 밀린 셈입니다. 호르무즈 해협의 유조선 통행이 재개되면서 걸프 지역의 원유 수출량도 전쟁 전 전고점 대비 75%~85% 수준까지 회복되었습니다. 단지 '표면적인 유가'만 보면 시장의 충격은 모두 가라앉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다릅니다. 지난봄에만 약 7,500만 배럴을 쏟아부은 미국의 전략비축유(SPR)는 현재 약 3억 3,100만 배럴로 1983년 이후 최저치입니다. 미국 전역의 원유 재고는 1984년 이후 최저치이며, 미 원유 실물 인도 허브인 쿠싱(Cushing) 지역의 재고는 12년 만의 바닥을 찍었습니다. 전략비축유를 다시 채워 넣는 것은 수년이 걸리는 장기 프로젝트이므로, 이 비어있는 창고 상태 자체가 적어도 2027년까지는 시장을 지배하는 핵심 변수가 될 것입니다.


유가는 떨어졌지만 시장의 '리스크 프리미엄'은 소멸한 것이 아니라, 가격 지표에서 '재고 레벨' 쪽으로 전이되었습니다. 전 세계 정부가 비축유를 채우기 위해 사들이는 배럴 하나하나는 시장의 강력하고 지속적인 매수(수요) 기반이 됩니다. 이 부분이 아직 유가에 온전히 선반영되지 않았으며, 최근 유가를 떨어뜨린 해협 재개방 역시 영구적인 평화가 아닌 '임시 조치'에 가깝습니다.

Oil Reserves at 40 Years Low

오래가지 못할 임시 휴전, 불안한 호르무즈 해협

지난 6월 체결된 휴전 협정으로 여름까지 이어지는 60일간의 협상 시한이 확보되었지만, 호르무즈 해협의 장기적인 안전 통항 조건은 여전히 미결 과제로 남아있습니다. 유조선 통행량은 전쟁 당시 최저점이었던 일일 960만 배럴에서 현재 1,200만 배럴 수준으로 올라왔으나, 선주들은 여전히 진입을 극도로 꺼리고 있으며 휴전 중임에도 선박을 겨냥한 산발적인 공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재의 바닷길은 안정적인 합의가 아닌, 살얼음판 같은 임시 상황 위에서 간신히 열려있는 상태입니다.


미 에너지정보청(EIA)은 호르무즈 해협의 물동량이 전쟁 전 수준으로 온전히 회복되는 시점을 2027년 초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주요 항로의 기뢰를 제거하고, 파괴된 걸프 지역 정제 시설을 복구하며, 선박 보험 및 용선 계약을 전면 재조정하는 작업은 단순히 '휴전 선언' 하나만으로 며칠 만에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가 홍해와 푸자이라 파이프라인을 통해 원유 우회 수송을 시도하고 있지만, 이는 호르무즈를 통과하던 하루 1,700만 배럴이라는 막대한 물량 중 극히 일부만을 소화할 수 있을 뿐입니다.


원유 시장의 완충 장치(비축유)가 이토록 바닥난 상황에서는 작은 뉴스 하나에도 유가가 발작적인 변동성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공급이 고점 대비 40% 가까이 증발했다가 급반등하는 과정에서 충격을 흡수해 주어야 할 '재고의 벽'이 허물어졌기 때문입니다. 향후 또 다른 지정학적 위기로 공급 차질이 빚어진다면, 세계는 지난 40년 동안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사상 최악의 무방비 상태(최저 재고)에서 충격을 정면으로 맞아야 합니다.


전쟁 첫 발이 가동되기 전, 이미 절반으로 줄어있던 글로벌 방어벽

2004년 당시 41억 배럴에 달했던 IEA 회원국들의 전략비축유는 2026년 초 전쟁 발발 직전 이미 18억 배럴 수준으로 감소해 있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원유 공급 중단 사태를 맞이하면서, 전 세계는 20년 전의 절반도 안 되는 방어벽을 들고 싸움터에 나갔던 것입니다. 이 감소세가 지난 수십 년간 워낙 서서히 진행되었기에, 실제로 비축유 탱크를 열어 써야 하는 위기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위기가 닥치자 얇아진 방어벽은 순식간에 녹아내렸습니다. IEA 32개 회원국은 사상 여섯 번째이자 공조 역사상 최대 규모인 4억 배럴의 비축유 공동 방출에 전격 합의했습니다. 이는 지난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 방출했던 1억 8,300만 배럴의 두 배를 웃도는 수치입니다. 이로 인해 지난 3월과 4월 두 달 동안에만 해상 운송 중인 원유를 포함한 글로벌 총 재고가 약 2억 5,000만 배럴(하루 평균 약 400만 배럴)씩 급감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서류상 보고되는 비축유 수치와 '실제 꺼내 쓸 수 있는 가용 재고'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습니다. 모든 전략 비축 시설에는 시스템 가동을 위한 '물 물리적 최소 운영 한계선(Operational Minimum)'이 존재합니다. 일례로 미국의 SPR은 전체 탱크의 최소 20%가 차 있어야 유체를 밖으로 밀어내는 압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즉, 비축유 창고가 0이 되기 훨씬 전부터 이미 가용 한계선에 도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현재 상업용 원유 재고가 바닥나는 속도는 '월(Months)' 단위가 아니라 '주(Weeks)' 단위로 측정될 만큼 가파릅


배럴당 $30에 산 원유를 $70에 채워야 하는 딜레마

과거 비축유 창고를 채웠던 원유들은 수십 년간 현재보다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에 매입된 물량들이었습니다. 미 에너지부(DOE)에 따르면 미국 SPR의 역사적 평균 매입 단가는 배럴당 $29.70에 불과합니다. 대부분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 저유가 시절에 사들인 것들입니다. 비교적 최근인 2023년부터 2025년 초 사이에 사들인 5,900만 배럴의 추가분조차도 평균 단가는 $76 미만이었습니다.


이번 IEA 공조로 방출된 4억 배럴을 현재 시세인 배럴당 $70선에서 다시 채워 넣으려면, 순수 원유 매입 대금으로만 약 280억 달러(약 38조 원 이상)가 필요합니다. OECD 국가들의 평균 역사적 매입 단가인 $45와 비교하면, 무려 100억 달러(약 13조 원) 이상의 막대한 '가격 갭(손실)'이 고스란히 정부 재정 부담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만약 IMF의 2026년 유가 전망치인 배럴당 $82선에서 매입이 진행된다면, 이 재정 손실 규모는 140억 달러까지 불어나게 됩니다.


미국은 단순 매각이 아닌 대여 방식을 섞어 방출했기 때문에, 원유를 빌려 간 매수자들로부터 일정 부분 할증된 배럴로 돌려받아 수량을 메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미봉책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비축유를 보관하는 지하 암염 동굴(Salt Caverns)의 물리적 노후화와 손상으로 인해 원유 주입 속도 자체가 크게 떨어져 있는 데다, 정부의 대규모 매입 시도 자체가 시장의 공개 가격을 자극하는 부메랑이 되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끝나도 사라지지 않는 수송·보험료 프리미엄

전쟁 전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유조선의 전쟁위험 보험요율은 선박 가치의 약 0.125% 수준이었습니다. 이것이 전쟁 최고조기에는 2.5%~5%까지 치솟았고, 지난 4월 1%대로 완화되었다가 현재는 1%~2% 밴드에 영구 정착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사태를 통해 호르무즈 해협이 단 몇 주 만에 전면 봉쇄될 수 있는 치명적인 초크포인트(병목 구간)임이 전 세계에 각인되었고, 보험사들은 이 잠재적 리스크 비용을 향후 모든 통항 선박에 상시 부과하기 시작했습니다.


호르무즈 해협을 매일 통과하는 1,700만 배럴의 원유에 배럴당 $2라는 보수적인 리스크 프리미엄만 적용하더라도, 전 세계 에너지 교역국들이 매년 추가로 지불해야 하는 돈은 120억~150억 달러에 달합니다. 이 연간 누적 비용은 일회성 비축유 재매입 비용보다 훨씬 거대하며, 걸프 지역에서 생산되어 전 세계 비축 기지로 향하는 모든 원유의 최종 인도가격을 고착화시키는 주범이 되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비축유를 다 채운 먼 미래까지도 전 세계가 계속 지불해야 하는 일종의 '전쟁 세금'인 셈입니다.


비축유 충원이 수개월이 아닌 수년이 걸리는 이유

미국은 2023년부터 2025년 초까지 연간 3,000만 배럴 수준인 총 5,900만 배럴을 가까스로 사들였으나, 이마저도 유가가 조금만 오르면 매입을 전면 중단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거북이걸음 속도라면 지난 2월 전쟁 발발 이후 방출한 8,400만 배럴을 다시 메우는 데만 꼬박 3년이 걸리며, SPR 총 용량인 7억 1,400만 배럴을 꽉 채우는 것은 다음 2030년대 기약해야 합니다. 방출하는 데는 몇 주면 충분하지만, 다시 쌓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립니다.


물리적·제도적 메커니즘도 속도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원유를 담아두는 지하 암염 동굴의 물리적 손상으로 재주입 공정이 지연되고 있으며, 대규모 비축유 매입을 진행하려면 의회의 대규모 특별 추가경정예산 승인이 필수적입니다. 현재 미 행정부는 전쟁으로 소진된 자원을 복구하기 위해 의회에 876억 달러 규모의 연방 보충 기금을 요청해 둔 상태입니다.


결국 '타이밍'이 비용을 결정합니다. 공급이 타이트한 시장 상황에서 정부가 대규모 사자(Buy-back) 주문을 내면 원유 가격 자체가 스스로 치솟기 때문에, 가장 이상적인 매입 윈도우는 리밸런싱 랠리가 아니라 공급 과잉이 완연한 진정한 '서플러스(Surplus)' 구간뿐입니다. 상업용 재고마저 부족해 민간과 정부가 동시에 원유 확보 경쟁을 벌이는 와중에 성급하게 비축유를 채우려다간, 막대한 프리미엄을 지불하는 악수를 두게 됩니다.


IEA의 냉정한 경고: "향후 3년간 매일 100만 배럴씩 더 사야 한다"

IEA의 정밀 추적에 따르면, 전쟁을 거치며 발생한 전 세계 석유 제품 및 원유의 누적 결손 가치는 2026년 말 기준 약 9억 배럴에 육박합니다. 이 거대한 구멍을 메우기 위해선 기존 시장의 내재적 수요 성장 외에도 향후 3년간 매일 100만 배럴의 추가 공급 물량이 시장에서 소화되어야 합니다. 비축유 충원은 단기 이벤트가 아니라, 2029년까지 시장 하방을 떠받치는 거대한 '고정 매수 호가(Standing Bid)'로 군림하게 될 것입니다.


하루 100만 배럴의 추가 수요는 중견 국가 하나의 전체 원유 수입량과 맞먹는 엄청난 규모입니다. 이 거대한 매수세가 마침 내년부터 시작될 원유 공급 과잉(서플러스) 사이클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됩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공급 과잉이 유가를 끌어내려야 하지만, 정부들의 비축유 충원 매수세가 하방을 방어하면서 두 힘이 팽팽하게 맞붙는 형국이 전개될 것입니다.


시장 구조상 '저렴한 유가'와 '공격적인 비축유 충원'은 오랫동안 공존할 수 없습니다. 유가가 떨어질 때 모든 정부와 정유사들이 동시에 재고를 채우기 위해 시장으로 돌진하는 순간, 그 매수세 자체가 유가를 밀어 올리기 때문입니다. 향후 10년간 국제 유가의 진정한 바닥(Floor)은 트레이딩 화면의 모니터가 아니라, 전 세계 비축 탱크의 잔고가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비축유 성적표: 준비된 자와 쫓겨가는 자

이번 에너지 전쟁은 위기를 대비해 온 국가와 그렇지 못한 국가의 명암을 극명하게 갈라놓았습니다. 중국은 지난 10년간 꾸준히 원유를 매집해 전쟁 발발 직전 세계 최대 규모인 약 13억 배럴의 비상 비축유를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이 막강한 재고 덕분에 베이징 당국은 국제 유가가 폭등할 때 스팟(현물) 시장에서 비싼 값에 원유를 사는 대신, 수입량을 평소의 3분의 1 수준으로 과감히 줄이고 국내 비축유를 꺼내 쓰는 영리한 선택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유가 정점 시기에 글로벌 유가를 진정시키는 완충재 역할을 헸습니다.

반면, 중국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의 성적표는 매우 초라합니다.

비축유 보유국 전쟁 당시 비축 포지션 전쟁 기간 중 취한 조치 향후 재건 및 충원 과제
중국 약 13억 배럴 (세계 최대 규모) 원유 수입량을 1/3로 줄이고 국내 비축유로 버팀 가장 유리하고 강한 위치에서 유연하게 재충전 가능
일본 정부 및 민간 재고 약 4억 7,000만 배럴 (약 224일 분량) 재고가 평년 계절적 최저치의 50% 수준인 10년래 바닥으로 추락 수년에 걸친 대규모 재건 사업 필요
미국 전쟁 전 약 4억 1,500만 배럴 (총 용량의 절반 수준) IEA 공조 하에 1억 7,200만 배럴 방출 약속 이행; 현재 1983년 이후 최저치 전쟁 전 수준 복귀에 8,400만 배럴, 풀 카파 충족에 3억 8,300만 배럴 필요
유럽 (EU) 90일 의무 비축 규정 상시 운용 독일이 원유 및 항공유 방출; 가독 혹한기를 거치며 가스 비축률 30%대 안착 민간 정유사들의 상업용 재고 확충 수요와 정부 충원 물량이 시장에서 충돌
인도 약 3,700만 배럴 (겨우 8일 치 수입 분량) 기존의 빈약한 재고마저 약 10% 추가 감소 IEA 기준(90일)을 맞추려면 4억 배럴 이상의 원유와 약 280억 달러의 천문학적 비용 필요
파키스탄 약 20일 분량의 정제유 재고 보유 얇은 상업용 재고마저 완전히 바닥날 때까지 소진 90일 방어벽 구축을 위해 최소 3,500만 배럴 규모의 신규 저장 시설 건설 시급


특히 인도가 안게 된 낙후 비용이 가장 무겁습니다. IEA 권고 기준인 90일에 턱없이 못 미치는 '8일 치 방어벽'은 지정학적 위기 시 아무런 보호막이 되지 못합니다. 이 구멍을 메우는 데만 현재 시세로 280억 달러(약 38조 원)가 소요되며, 이는 신규 저장 기지를 짓는 건설 비용을 제외한 순수 원유 매입 대금일 뿐입니다. 평화롭고 유가가 낮았던 시절 비축 기지 건설 비용을 아꼈던 국가들은, 이제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가져오는 대가가 얼마나 혹독한지 뼈저리게 깨달으며 몇 배의 비용을 청구받고 있습니다.


원유 수입국이 독박을 쓸 때, 수출국은 횡재 가도를 달렸다

이번 전쟁은 글로벌 부의 지도를 '승자와 패자'로 명확하게 갈라놓았습니다. 에너지 수출국들은 유가 폭등의 수혜를 고스란히 누렸는데, 미국의 에너지 수출 대금은 약 500억 달러 증가했고 러시아 역시 걸프 지역 경쟁사들이 주춤한 사이 150억 달러 이상의 반사이익을 챙겼습니다. 반면 모든 충격을 온몸으로 흡수한 원유 수입국들은, 전쟁 당시 폭등한 주유소 가격을 감내한 것도 모자라 이제 비축유를 채워 넣기 위한 두 번째 청구서를 받아 들었습니다.


특히 유럽은 천연가스 대란이라는 치명적인 연타석 홈런을 맞았습니다. 지난 3월 초 카타르에너지가 가스 수출에 대해 불가항력을 선언했고, 라스라판(Ras Laffan) LNG 생산 단지가 공격을 받아 유럽행 카타르 LNG 공급 능력이 17% 증발했습니다. 이 시설을 복구하는 데만 최소 3~5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자 네덜란드 TTF 천연가스 선물 가격은 메가와트시(MWh)당 €60를 돌파하며 순식간에 두 배로 뛰었습니다. 이 여파로 유럽중앙은행(ECB)은 3월로 예정되었던 금리 인하를 전격 보류하고 인플레이션 전망치를 상향 조정했으며, 영국의 물가상승률은 2026년 5%를 돌파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일부 고립된 유럽 공항에서는 항공유 배급제까지 실시되었습니다.


IMF는 지난 4월 발표한 세계경제전망(WEO) 보고서의 부제를 *'전쟁의 그늘에 가려진 세계 경제'*로 명명하며 매크로 타격을 수치화했습니다. IMF는 2026년 글로벌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3.4%에서 3.1%로 대폭 하향 조정했고, 헤드라인 물가상승률은 4.4%로 올려 잡았습니다. 지정학적 상황이 악화되는 비관적 시나리오에서는 성장률이 2.5%까지 추락하고 물가는 5.4%까지 치솟을 수 있으며, 최악의 경우 성장률 2% 붕괴와 6%대 이상의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도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게다가 봉쇄된 호르무즈 해협은 전 세계 질소 비료 수출의 30%를 담당하는 통로이기도 하여, 이번 에너지 쇼크는 가스-비료-곡물 체인을 타고 전 세계 장바구니 식료품 물가 폭등으로 직결되고 있습니다.


2027년 공급 과잉 사이클과 비축유 매수세의 정면충돌

IEA는 2026년 일일 1억 240만 배럴까지 떨어졌던 글로벌 원유 공급량이 2027년에는 일일 1억 1,030만 배럴 수준으로 약 800만 배럴 급반등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내년이면 완연한 공급 과잉 장세가 펼쳐지는 셈입니다. 일반적인 매커니즘이라면 이 서플러스가 유가를 끌어내려 정부들이 비축유를 싸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맞지만, 전 세계 정부의 '비축유 충원 연대 수요'가 이 하락 압력을 정면으로 가로막고 나설 것입니다.


더욱이 이번 공급 회복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기초체력은 생각보다 취약합니다. 전 세계 원유 설비 투자(CAPEX) 규모는 2026년 기준 5,000억 달러 미만으로 떨어지며 3년 연속 감소세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가 고갈된 비축유를 채우고 포스트 전쟁 수요 회복에 대응해야 하는 시점에 정작 미래 생산 능력을 다지는 투자는 줄어들고 있는 것입니다. 투자 기반이 쪼그라든 상태에서 9억 배럴의 누적 재고 구멍을 메워야 하는 현 구조는, 향후 아주 작은 2차 충격만 발생해도 시장이 이를 흡수할 여력이 전혀 없음을 시사합니다.


트레이더들이 향후 방향성을 가늠하기 위해 주시해야 할 3가지 핵심 포워드 시그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비축유 충원 매수세의 집행 속도: 이 속도가 빨라질수록 유가의 하방 지지선(Floor)은 더욱 단단해집니다.

  2. 미국 정제유(디스틸레이트) 재고 추이: 현재 5년 평균 대비 13% 아래를 밑돌고 있어, 항공유와 경유 수급의 타이트함이 IEA의 마지노선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습니다.

  3. 호르무즈 해협의 완전한 정상화 시점: EIA는 2027년 초 전에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으며, 해협 통항의 최종 법적 조건이 합의되지 않는 한 언제든 다시 닫힐 수 있는 시한폭탄 상태입니다.


총평

고갈된 전략비축유를 전쟁 전 수준으로 되돌리는 순수 비용은 현재 유가 기준으로 약 280억 달러입니다. 과거 저가 매입 단가와의 격차에서 발생하는 약 100억~140억 달러의 회수 불가능한 재정 손실은 이미 확정되었으며, 영구화된 중동발 선박 보험료 프리미엄은 매년 120억~150억 달러씩 전 세계 무역망에 상시 누적되고 있습니다. 비축유 충원 비용은 모니터 화면의 유가 그래프가 안정된 이후에도, 전 세계 경제 체력에 조용히 합산되는 진정한 '전쟁의 청구서'입니다.


향후 3년간 원유 시장의 판세를 지배할 진짜 트레이드는 '현재의 스팟 주가'가 아니라 '비축유 충원 매수세(Refill Bid)' 그 자체입니다. 매일 100만 배럴씩 3년간 유입되는 추가 수요는 IEA가 예고한 2027년 공급 과잉 물량을 흔적도 없이 집어삼킬 수 있는 파괴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년에 도래할 공급 과잉 윈도우는 비축유를 가장 저렴하게 채울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며, 이때 기민하게 움직이는 정부는 향후 또 다른 공급 충격이 발생했을 때 비축유의 진정한 가치를 깨달으며 막대한 비용을 아끼게 될 것입니다.


2004년 41억 배럴에서 오늘날 18억 배럴로 줄어든 비축유 잔고야말로 그간 우리가 누려왔던 '값싼 유가'의 숨겨진 이면이었습니다. 인류는 지난 20년 동안 비용 절감이라는 미명 하에 자만하며 안전마진을 스스로 갉아먹었고, 그 방어벽의 진짜 가치를 단 한 분기 만에 뼈저리게 학습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세계는 평화로웠던 시절에는 결코 청구되지 않았던 혹독한 대가를 치르며, 그 안전마진의 벽을 바닥에서부터 다시 쌓아 올려야 하는 엄중한 과제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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